짧은 치마와 동영상
짧은 치마와 동영상
21세기는 20세기와는 무척 다르다. 천 년 시대가 가고 이천 년 시대가 왔으니, 숫자적 개념으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환점이다. 각종 매스컴들도 경쟁적으로 21세기의 아름다운 희망을 노래하였다. 1999년 12월 31일, 한 세기의 일몰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천 월미도로 강화도로, 일출과 월출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마량포구로 몰려 그쪽으로 가는 도로는 차량 정체가 극심하였다.
일몰도 그랬으니 한 세기의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의 행렬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일출의 명승지인 강원도 정동진, 포항 호미곶, 남해 보리암, 제주도 성산 일출봉 지역 등에는 숙박시설이 동이 나고 음식점도 장사진(長蛇陣)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인데도 조금이라도 더 일출의 장관(壯觀)을 볼 수 있는 곳을 선점하려고 노숙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니 가히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는 자연도 벅차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모든 사회적인 이슈는 21세기의 신천지(新天地)를 조명하는 일이었고, 기업이나 관공서의 브랜드(Bland)도 21세기의 혁명에 화두를 던지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교육도 21세기의 창의적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약속을 거창하게 던졌다. 이러한 21세기의 시작도 벌써 10년이나 흘렀는데, 과연 신천지는 열리고 있으며 혁명도 이루어지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 아직도 좀 젊었거니 생각하는데도 요즘의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기가 너무 버겁다. 학교에서 먹물을 먹고 있으면서도 청소년들의 생각을 따라 잡기에도 역부족이니, 기업의 투자마인드를 곁눈질하여 종자돈을 좀 늘려 보려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에 관심을 두는 일도 이제는 남의 일처럼 되었는데 IT 세계의 이해는 불문가지(不問可知)로 깜깜하다. 스마트폰을 공짜로 준대도 매뉴얼이 복잡하여 도무지 사용이 불가능하고, 시력도 변변치 못해 작은 글씨는 먼 산 속에서 날리는 한 점의 낙엽에 불과하다. 방향감각이 동물적 재능에 가깝다고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거리를 자주 헤맨다. 그러나 아직 휴대폰으로 통화도 하고 문자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려고 하니 서리 맞은 김장배추 마냥 차고 시린 느낌에 가슴이 섬뜩하다.
그런 정보화 시대와는 궁합이 맞지 않고 괴리감도 있었으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래도 교원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그래 어디 세상 한번 변하려면 변해 보라. 나는 상관없다.’ 면서, 학생이 있고 백묵만 있으면 된다는 거들먹거림으로 세상의 변화를 우습게 본 적도 있다. 사제 간의 대화는 가슴으로 사랑으로 하는 것이라 IT에 좀 부자연스러워도 좋고, 백묵만으로도 빔 프로젝트 같은 첨단 교구에 못지않은 감동적인 수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고, 사제 간에 신뢰도 한물간 생선 꼴에 다름 아닌 신세가 되었다.
21세기가 학교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교실붕괴 현상이다. 2002년부터 교실 붕괴는 급속하게 진행되어 왔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곤두박질치고 사교육을 잡겠다던 정부는 오히려 사교육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서민들의 주름살만 더 깊게 패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수천억의 돈을 쏟아 부으면서 학교를 정상화 하겠다고 큰소리치다가 결과가 여의치 않자 모든 것을 교원의 탓으로 몰아 붙였다. 그런 논리로 교장․교감이 무능하다고 단정 지으면서 온갖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고, 교원평가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래도 교사들은 좀 낫다. 교사들은 교장․교감을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 존재로,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는 없어져야 할 존재로 몰아붙이기도 하고, 술집에서 안주로 삼아 수업시간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모두 날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스스로 그런 존재임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양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교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의 부패한 모습을 보다보면 술자리의 안주로, 분풀이 대상으로 쓰이고도 오히려 나머지가 있는 존재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교장들은 묵묵히 교육의 정도를 걸어가고 있다. 그 사람들은 안주를 삼는 교사들보다는 오히려 더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신념도 강한 사람들이다. 교장도 교사와 다름 아니다. 학교를 운영해 가는 동료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교장을 무조건 타파의 대상으로만 여기니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일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아무리 볼품없어도 아비가 살아 있으면 훨씬 든든한 백이 되고 행복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결국 스스로의 심장을 겨누어 퇴출 압박으로 이어지고 분풀이 대상이 된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논리를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최근 교육청 관리들과 일선 교장들의 부패가 거의 일 년이나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교사를 제외한 모든 교장과 교육전문직은 부도덕하고 부패한 세력으로 냉소(冷笑)를 받았고, 마침 이틈에 치러진 지방선거나 교육감 선거 바람을 빌어 교육 가족들은 더욱 설 틈이 좁아졌다. 물론 그러한 부패와 부정이 일상적인 관례였다고 하더라도 용서하여서는 안 된다. 단호하게 척결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 그것으로 교육이 정상화 되느냐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진보주의가 교육을 이끄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 시대에는 학연․지연에 얽매인 정실인사와 재정의 편중 현상이 정도를 벗어났었다. 그래서 그동안 항상 떠밀려만 다니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가슴앓이가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상쾌함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변화가 필요했고, 보수적인 마인드만으로는 과거 교육의 불균형과 왜곡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지 않은 사람들의 선택이 큰 힘을 발휘하여 진보주의 교육 세력의 물고를 터놓았다.
그런데 역사의 흑막(黑幕)을 들여다보면 정말 아이러니하다. 군부 독재 정권에 평생 항거하면서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견디어 낸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독재가 맛 들여 놓은 단맛을 미련 없이 뱉어버리지 못했다. 집권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단맛 없는 음식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 때문이랄까. 또한 억지 공약과 피붙이들과 공신들에 대하여는 비정한 회초리는 들기가 쉽지 않았으니,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로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은 위정자(爲政者)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폐수에서 산천어를 기대하는 일이다.
참여정부도 보통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큰소리는 쳤으나 시민단체의 권력을 가진 자와 의도되고 동원된 소수를 제외한 보통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해 보지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오히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평생 벌어도 집을 장만할 수 없도록 천정부지(天井不知)로 부동산 버블을 만들었고, 용이 날 수 있는 개천마저도 말라비틀어지게 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국민의 가슴에 실망을 던지고 혼자 날아가 버렸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10년이 지났지만 교실 붕괴는 더욱 심해만 지고 있다. 위정자들은 백약이 무효인 줄 알면서도 출구전략(出口戰略)을 몰라 계속하여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진보주의 교육 시대가 되었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이목만 끌어보려는 포퓰리즘 속에서 무경험자들이 고집과 독선의 옷을 입고 편협한 이념의 상차림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진작(眞勺)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즘 교육의 화두(話頭)는 두 가지다. 무상급식과 학생 인권, 그 두 가지 본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교실을 한번 들여다보라. 꾸며 놓은 교실에 가지 말고 신분의 치장(治粧)을 지우고 몰래 숨어 들어가서 교실의 진풍경(珍風景)을 한번 들여다보라. 그들에게 지금 당장 급한 것이 과연 밥이겠는가? 그렇다고 지금 시대가 옛날처럼 점심시간만 되면 우물가로 가서 우물 한 두레박씩 퍼 먹고 점심끼니로 대신 때웠던 시대인가. 누구도 굻지 않는다. 가난한 학생도 굻기는커녕 급식에 별로 관심도 없다.
그렇다고 인권인가? 인권도 정말 중요하다. 밥은 굶어도 인권에 대한 유린은 못 참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꼿꼿한 선비정신이다. 우리도 그들의 후예이니 인권의 중요함을 무슨 다른 말로 바꾸겠느냐만,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강조하는 교육도, 민주시민의 기본 질서교육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먼저 인권이라는 단맛을 줘 버린다면 누가 그들에게 몸에는 좋지만 쓴 약을 먹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지금까지 그들의 인권이 과거 청송교도소나 무슨 수용소처럼 무시당하여 왔던 것도 아니다.
스승은 학생을 존중하고 사랑하였으며 학생들도 스승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다만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의 기본을 아는 지혜를 가르치고자 매를 들었을 뿐이다. 교복과 두발을 단정히 하고 수업 시간에 잠자거나 떠들지 않고, 남을 때리거나 남의 돈을 뺐지 말라고 가르치는 도구로 매를 사용해 왔다. 물론 폭력에 가까운 매를 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왔고, 만약 심판이 좀 약하다면 그들에게는 더 엄한 벌을 내리면 될 터이다.
그런데 교육청은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학교에 와 보면 교장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별로 없는데도 교장의 무소불위(無所不爲) 권한을 회수해야 한다고 야단이다. 언제 그런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었는지 되묻고 싶다. 주지도 않은 권한을 뺏겼다고 하니, 교장 없는 학교를 만들려 하거나, 교육청이 교장의 몫까지도 모두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기도교육청에서는 교장실을 없애고 행정실과 통합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쓰레기나 줍고 교실 문이나 열어주는 교장 노릇을 시키려면 하긴 교장실이 필요 없기는 하겠다.
서울시교육청은 ‘체벌금지 생활지도 매뉴얼’을 마련해 학교에 보급한다고 한다. 체벌금지와 관련해 복장․두발 불량 및 학습태도 불량, 음주, 음연 등 18가지 문제 행동을 유형별로 정리하고 단계별 대응 방법을 소개한 매뉴얼을 제공하는 것이다. 매뉴얼에 따르면 교사들은 욕설․폭언을 하며 반항하는 학생에게는 소위 ‘성찰교실’에서 상담을 받도록 하고, 학생이 공개 사과하도록 하며, 시설물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책걸상실명제 등을 도입한다고 한다. 불량행동을 반복하는 학생에게는 벌점 부과, 성찰교실 격리, 학부모면담, 봉사활동 참여 등의 불이익을 주는 방안으로 지도하면 된다고 한다. 참으로 친절하고 고마운 교육청이다.
이러한 기발한 착상들을 보니 교육청의 노력이 정말 가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를 도와주려는 노력에 박수도 보내고 싶다. 시대가 정말 변했으니 옛날의 그 시절로 돌아가서도 그리워해서도 안 되게 되었다.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으니 결과는 도가 나올지 모가 나올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던질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던진 주사위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눈을 씻고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던지기도 힘든 주사위를 던졌으니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른다고 우겨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되고 교사들도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학생들도 스승을 믿고 따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매뉴얼에 담긴 과분한 노력들이 과연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주사위든 윷이든 던진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과연 방법이 온당하고 시기적으로 적절한 윷놀이였는지를 좀더 철저히 따져 보라고 주문하고 싶다. 교복 치마가 짧으면 재활용 교복을 활용해 덧대 입을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옷감을 제공하라는 지침이 도대체 학교 현장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생각인지 아닌지 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위정자들이나 교육청의 관리자들이 앞장서서 교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칭찬리더십의 중요성을 밥 먹듯이 매번 줄기차게 연수를 시키면서도 정작 교육의 선봉장인 교원들을 매도의 대상으로 삼거나 특히 교장이 필요 없는 학교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선장이 없는 배가 제대로 항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교장의 정당한 권위가 무너지고 학생들에 대한 교사들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 교육적인 성취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하다. 그 좋았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지름길은 교원들에게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 우선이다.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을 동영상으로 찍어 훈계 자료로 삼으라는, 이제 스승도 제자도 없는 세상으로 만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란다.(201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