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최선은 아니다
불가의 어느 고승의 선문답에,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죽은 새끼 고양이 대가리가 가장 귀하다’라서 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아무도 값을 매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값진 물건, 이는 세속이 구분하는 귀천의 지평을 넘어서는 절대적 값을 상징한다. 싸거나 비싼 가격으로 구별할 수 없는 죽은 고양이 대가리는 인간의 생각과 분별이 미치지 못하는 세속을 초탈한 세계다.
귀하고 천하다는 생각은 인간이 어느 한쪽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가에서는 귀하고 천한 것이 없어서 개도 불성을 지녔다고 한다. 오로지 우주 만물이 모두 평등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 욕심을 버리고 편견을 버리면 이분법적인 사고로 빚어지는 불행한 판단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귀한 것이 언젠가는 천한 것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겨난다. 인간의 소유욕, 정복욕이 만물의 귀천을 가름 짓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욕심은 사람에 대하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현실을 살펴보자. 많은 부모들은 아직도 자기 자식들을 개성과 인권을 가진 존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소유물로 생각한다. 자식들에 대한 소유욕이 불행한 아이들을 만들고 있다. 뱃속의 태아도 하늘이 내린 귀한 생명으로 여기는데, 이 세상의 아이들은 태아만큼의 자유로움도 없다.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면 과언일까?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혹독한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되는 데도, 공부 잘하는 아이,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차지하는 경쟁의 굴레 속에서 한 순간도 뛰쳐나올 수 없도록 삼엄하게 경계한다.
부모들은 자신들도 잘 알고 있다. 공부 좀 잘한 것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학창시절의 범털이 결코 만연에도 행복을 누리고 살도록 세상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령 문제집 열심히 풀어 소위 명문대학 간 아이들이 잘 살게 된다는 확률이 좀 높다고 하더라고 태어나서부터 30년 이상 비인간적인 제도와 경쟁 속에 몰아넣는 일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사는 일 중에서 공부하고 사는 일이 가장 재미있고, 공부할 때가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예외가 될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선문답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값을 매겨서는 안 된다. 모두가 귀한 존재들이다. 언제 어떻게 제값을 할지 모르는 아이들이다. 누구도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방해할 권한은 없다. 부모도 선생님도 국가도 그럴 자격이 없다. 인간은 모두가 천부 인격을 가지고 태어났다.
요즘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공방이 뜨겁다. 학교는 대체로 부정적인 기류가 강하다. 물론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인권조례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몇 가지의 내용 때문에 더욱 열을 내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인권의 소중함을 알고는 있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체벌이 금지됨에 따라 학생 생활 지도가 어렵고, 그래서 생활 지도를 포기하고 만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무례하고 굴고 심지어 폭언과 폭행도 불사한다고 하니 이런 사례들만 보면 학교 집단이 이제 무슨 깍두기 집단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역지사지해 보라. 강압으로 생활 지도를 해 왔던 현실이 과연 최선인가? 현실 타령만 하고 과거의 교사 편의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직도 미개의 사회에 불과하다.
생각을 바꾸면 마음이 편해진다. 체벌 없이 아이들과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하고 그들 편에서 사고하고 상담하고 올바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면, 당장은 좀 어수선하고 때때로 선생님에 대한 불손이 마음에 서운하게 와 닿겠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정화되어 인간의 참 본성을 찾을 것이다. 너무 성급하게 일사불란한 결과만을 요구하다보면 세상의 어떠한 현실도 바꿀 수 없다. 생각해 보라 현실이 최선인가. 세상의 물질적 변화에는 민감하게 대처하고 혹 조금이라도 잇속을 챙기지 못할까봐 안달을 내면서도 아이들의 변화는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무슨 억지란 말인가.
직접 체벌은 안 되고 간접 체벌은 된다는 식의 논란도 우습다. 일부 지자체의 체벌 금지에 대하여 교과부는 간접체벌을 허용한다는 법령을 만들고 있다. 간접체벌 한다고 학생들이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인가에 대하여, 교육적 효과가 있는 가에 대하여 교육자의 냉정한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 눈으로 보기에는 엎드려뻗쳐 시키면 교실 분위가 좀 조용해 것은 현실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라고 해서 그런 식의 지도가 계속해서 정당성을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만족하도록 제대로 잘 가르치고 소통하고 래포를 형성하면 체벌 없는 학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미 체벌없는 학교가 대세다. 거대학교에서 어떻게 맨투맨식의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현실을 또 내세우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방향이 맞으면 가야하는 노력만 생각해야 하는 시대다. 사실 거대학교지만 선생님 숫자도 적지 않다. 다만 생활 지도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다수라는 현실을 먼저 읽어야 하지 않을까.
복장과 두발 자유화가 걸림돌이라도 또 야단이다. 우리 세대들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자. 우리 세대는 출가승에 비견할 만한 까까머리 신세로 중고등학교 6년을 다녔다. 흉터 진 뒤꼭지가 드러나도록 검은 머리털 빛이라고는 없는 출가승의 머리에 대해 자랑스러웠는지, 부끄러웠는지. 물론 지금은 그런 정도 아니니 말이 안 된다고 논하면 또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중학생의 생각과 행동은 지금 시대로 말하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4학년만 되면 머리를 깍도록 해야 하는가? 머리 길다고 유흥업소 출입이 허용되는 시대도 아니다. 자기 개성대로 기르다 보면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은 귀찮아서라도 자기 성격에 맞도록 두발이 정리될 것이다.
교복도 마찬가지다. 요즘 웬만한 교복은 아버지의 양복 값을 넘는다. 명품이나 유명상표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성인이 오히려 모범(?)이 되고 있지 않은가. 경제 교육 제대로 시키고 부를 독식하는 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베풀고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교육이 더욱 절실한 시대다. 청바지 입고 다니는 가난한 대학생들도 옷 때문에 젊음이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모른다고 해도 교육으로 가르쳐야 한다. 기성세대가 모범을 보이고 외형적인 치장보다는 정신적인 여유와 풍요로움을 가르치는 계기로 활용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강제성 야간 자율학습 및 보충수업도 당연히 금지되어야 할 일이다. 다만 스스로 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다. 특히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경우 집에서는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못되고 공부방도 없고 그렇다고 독서실에 갈 만한 경제적인 여력도 없다. 집 환경이 좋아도 학교에서 공부하면 더 잘된다는 학생들도 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밤새도록이라도 학교를 개방해야 되지 않을까? 밤새도록 공부하든지, 방과 후에는 다양한 체험과 독서, 봉사활동 등으로 자신을 키워가든지 그것은 오직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일 뿐이다. 그런 선택의 기회를 제한하여 획일적인 동형화의 우려를 범해선 안 된다. 이미 일부 고등학교를 제외하면 강제로 보충수업 시키고 자율학습 시키는 학교가 없다. 선택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조례에 그 내용을 담는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의 자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약한 것이 자립성, 자기주도성, 자치능력이다. 알다시피 성인이 되도록 엄마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학에 가서도 학점 신청을 부모가 대신해 준다고 한다. 이런 젊은이들을 키워서 어쩌자는 것인가? 참으로 암담한 대한민국의 미래가 눈에 선하게 그려질 뿐이다. 자식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식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다. 자식은 자식 자신의 것일 뿐이다.
학생들이 뭘 안다고 인정해서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시키고, 스스로 축제를 기획하고 교육활동 편성에 참여시키자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자신들이 주인공인 학교생활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도록 하자는 뜻에서 필요한 자치 능력이다. 학교에서의 집회의 자유도 문제가 크다고 한다. 초․중등학교 시절에 집회를 통한 의사 전달 등의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대학생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가치 판단 없는 행동이 휩싸이는 것이 아닐까. 술은 어른에게 배우라는 말이 있다. 이미 나이 먹어 술을 배우면 교육적 효과가 낮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무한한 집회의 자유를 누리기 전에 절제되고 통제된 중고등학교 시절에 집회의 맛을 보면서 집회가 갖는 의미의 소중함도 교육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우리 아이들에게 기성세대는 편협한 선입견을 버려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성인(成人)도 아니고 성인(聖人)도 아니다. 부모의 욕심을 담보하는 도구로 활용해서도 안 되고 문제 잘 푸는 아이로 만들기 위하여 행복과 상관없는 고통과 부자유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꼼꼼히 들여다보라. 내 자식이 아니라도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사랑을 앞세우면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현실이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이 최선이 아니다. 이 현실은 언젠가는 케케묵은 것이 되기도 하고,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어느덧 우리들도 모르게 현실로 와 있지 않는가? 불가능도 완전한 것도 없다. 소중함으로 인간과 아이들을 대하면 모두가 행복해 지는 사회는 먼 이상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된다.
(2011.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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