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나의이야기

인적 드문 한가위 내고향

청오 2011. 10. 14. 14:44

 

인적 드문 한가위 내 고향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는 기원은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말이다. 굶주림과 고통의 보릿고개를 넘고 한여름 질곡의 일상을 견디어 온 결실과 풍요의 계절이기에 가장 그리운 축제는 아무래도 한가위일 것이다. 설날과 비교해서 즐거움의 우위를 따지는 것은 난형난제의 문제이겠으나, 설날은 어린시절에, 한가위는 성인이 되어가면서 더욱 그리운 축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된다.

  운동화에 골덴바지라면 금상첨화이겠으나, 몇 겹이나 꿰맨 양발이 아닌 새 양말이라도 최소한 기대되는 설빔, 섣달 그믐날 잠자면 굼벵이 된다는 말에 할머니께서 켜 놓으신 촛불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들지만, 어둠이 물러나지 않은 새벽길을 따라 발끝이 저려오는 서릿발 추위에도 손등을 부비면서 건너 동네까지 친척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면서 적지만 세뱃돈 받을 욕심에 설날은 어린 시절에서 가장 큰 꿈의 축제였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가면서 설날보다는 한가위는 더없는 그리움의 축제였다. 급격한 산업화로 노인들만 남겨놓고 모두가 고향을 떠나갔다. 제대로 된 보따리 싸 가지고 갈 형편을 못되었지만, 먹고 사는 일은 도회지에 있었으니 떠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빈손으로 객지로 떠나갔기만 돈 잘 벌어 여기저기서 폼 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자식 공부는커녕 고단한 일상을 버티기 힘들게 살아가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한가위가 되면 잘살고 못사는 경계를 따지지 않고 그들은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운 가족들도 만나고 첫사랑이라고 놀림 받던 철이도 순이도 만나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도회지에서 돈 많이 번 얘기, 노총각 결혼 이야기, 자식 농사 이야기들로 밤을 새웠다. 그들이 쏟아놓는 말의 진실 여부를 누구도 따지지 않는다. 기죽기 싫어서 부풀려 하는 이야긴 줄 뻔히 짐작은 하지만 모른 체 부러워해 주고 고개 끄덕여 주면서 친구들과 고향은 그들을 훈풍으로 맞았다.

  먹고 살기 어려워도, 장시간 차를 타고 내려오는 힘든 여정 속에서도 고향을 향하는 귀성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막걸리에 취흥이 올라 바깥으로 나서면 영롱한 한가위 보름달이 포근한 솜이불처럼 다가오고 어린시절 추억과 꿈의 둥지 속으로 우리들을 이끄는 고향의 밤은 넉넉한 어머니의 품 속 그 자체였다. 이삼일 뒤에는 각자의 현실 속으로 떠나가야 하지만, 가슴에 품은 꿈처럼 언제든지 우리를 기다려 주는 고향이 있기에 떠나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그런 낭만의 축제가 없어졌다. 철이도 순이도 오지 않는 고향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변했다. 한가위 민족의 축제라는 말이 별로 실감이 안 난다. 여전히 귀성행렬이 있고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었지만 마을 공터에도 사랑방에서도 친구들은 없다. 잠시 왔다가 가 버리거나 관광지로 몰려다니며 한가위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에 집착하면서 고향을 슬그머니 버려 버렸다. 고향은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그때의 추억이 살아있는 마을 공터도 사랑방도 남아 있는데 말이다.

  명절이 되어도 썰렁한 고향마을, 한때는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선 차들이 고향의 명절을 실감나게 했지만 이제는 골목길이 넓은 신작로처럼 보일 뿐 차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향마을은 평소보다도 더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마을을 지키던 노인들마저 자식들한테 명절을 쉬러 역귀성을 해 버린 탓이다. 축제를 즐기던 철이의 흥겨운 아우성을 듣고 싶다. 집집마다 모여 먹고 마시던 갖은 송편도 막걸리도 그립다. 웃음소리와 꽹과리 소리, 마음에 그린 첫사랑, 시집갔다 친정에 쉬러온 순이도 보고 싶다.

  마을에 애기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50대가 동네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다. 보통 한 집에 한두 명의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70년대 고향을 떠났다가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이미 반백이 넘는 나이다. 그렇게 노인들만 고향마을을 지키고 살아가지만 추석이나 여름휴가 설날연휴가 되면 객지에서 사는 자식들이 고향으로 몰려들었었다. 한창 전성기인 60년대의 고향마을을 보는 듯이 전국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모이는 명절은 별도의 프로그램이 없어도 모든 것이 축제였다. 삭막한 도시에서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온 그들을 아픔을 잠시라도 잊게 해 주고 마음을 달래주는 고향은 모두에게 생명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이제 고향에 올 일이 없어졌다. 자녀들이 어렵고 귀성전쟁을 치러야 하니 도시로 제사를 가져가 버렸고, 제사가 없거나 지내지 않은 집도 자녀들의 편리를 감안해 부모님들이 역귀성을 하는 추세가 점점 늘고 있다. 명절에도 고향을 찾지 않으면 이제 언제 고향에 올 것인가. 고향에 어쩌다 오더라고 고향이 주는 편안하고 푸근한 맛을 느낄 수는 있을까.

  그나마 아직은 위안이 되는 것은 고향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추석 명절에 앞서 벌초를 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많이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재수가 좋으면 길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것으로 추억은 끝난다. 대개는 산소에 들러 벌초하고는 동네 어른들 찾아뵙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옛 축제의 맛을 보지지 않고 그냥 휙 떠나버리니 여전히 그들과 함께하는 고향의 맛은 그리움의 대사일 뿐이다.

  여름휴가 때가 되어도 이제는 고향에 사람들이 없다. 옛날에는 동네 앞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물속으로 피라미 떼가 줄지어 다녔기에 한여름 휴가 나기에 더 없이 좋은 고향마을이었다. 그러나 마을마다 들어선 축사가 시냇물을 오염시켜 버렸기에 이제는 물속에 들어갈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최근에는 좀은 엄격한 축사 오폐수 관리 등으로 물이 많이 깨끗해져 가고는 있지만 옛날같이 옥빛의 깨끗한 물을 만나기는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고 싶다. 물이 맑아지면 헤어진 철이도 순이도 고향의 마을의 냇가에서 공터에서 사랑방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삭막한 한가위를 맞아 진정으로 염원한다. (2011.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