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과 음료수
경제가 어렵기는 어려운가 보다. 선거를 앞둔 요즘 정치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많은 말들은 경제 살리기다. 70년대 추억을 되돌리는 잔술을 파는 대포집이 생겨나고 까치담배를 파는 구멍가게도 길거리에 눈에 설지 않게 보인다.
고전적인 목욕탕도 찜질방 사우나에 밀려 달동네 비좁은 골목길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고 있다. 우리 동네는 남들이 중산쯤이나 되어야 산다는 아파트 동네이지만, 고전적인 목욕탕이 아직도 주변에 있다. 살아남으려는 치열한 생존전략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목욕비를 3,000원으로 내렸다.
도회지 풀풀 날리는 먼지 마시고 사는 사름들에게 목욕탕은 참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옛날에는 설을 맞으려고 섣달 그믐날쯤이나 일년 묵은 때를 벗어내는 것이라 여긴 목욕이건만, 요즘 목욕탕은 때를 벗기는 장소가 아니라 휴식의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 토요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자녀들을 동반한 밤샘 찜질방 투숙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나도 퍽 물을 즐기는 사람이다. 물에만 들어가면 묵은 피로가 싹 풀리는 체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식들도 내 체질을 닮은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목욕탕 타령이다. 물보다는 오락실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일 터이지만. 제법 돈도 많이 들어간다. 다섯 식구의 입장료에 음료수 비 등등 합치면 제법 지갑을 괴롭힌다. 하지만 열꽃을 둘러쓰고 땀 한번 흠뻑 흘리고 난 다음의 시원한 음료수는 돈이 얼마인지를 가리지 않는다. 그 맛은 돈에 비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그런 음료수값 정도는 돈도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져 버린 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런데, 이런 음료수 값에 둔감해 진 것은 실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몇 해 전, 자식들이 좀더 어릴 때, 난 주말이면 자식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갔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 아들놈의 한 주 동안 묵은 때를 벗기고 나면 힘이 보통 드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몸을 맡기고만 있는 자식놈들의 얼굴에 더 힘든 표정이 역력하니, 힘들다 말할 수도 없다. 한증의 두어 시간은 목을 마르게 한다. 탕에서 나와 휴게실에 놓여 있는 음료수가 가득 남긴 냉장고에 눈이 먼저 가는 아들놈들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고 재빨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고 내가 조른다. 처음에는 아들들이 음료수를 사 달라는 아수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항상 사 주지 않은 내 의도를 이해한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음료수 타령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나와 집에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음료수를 사 준다.
목욕탕 음료수는 참 비싸다. 골라잡아 천원이다. 다섯 가족이 마시려면 오천이나 든다. 수퍼에서는 600이면 사는 음료수 가격 때문에 목욕탕 음료수는 항상 내 안전에서 멀어졌고, 또 그렇게 그렇게 살아왔다. 눈 오는 길, 얼음이 꽁꽁 어는 추운 겨운 목욕탕을 나서서 집으로 오는 길에서 마시는 음료수. 그래도 참 행복했다. 열기를 마시고 탕에서 나오자마자 휴게실에서 마시는 음료수의 그 목마름을 달래주는 상쾌한 맛을 도대체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 나도 내 자식들도 그런 맛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절약하려는 가장의 생각에 따라준 아내와 자식들에게 참 고맙고 행복했다.
이제 제법 살만하게 되었다. 좋은 동네에서 다섯 가족이 살아가기에 좁지 않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목욕탕에서 음료수 값을 아끼려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목욕탕 내에서 마시는 음료수도 그 옛날 영하의 날씨에 목욕 후 집으로 오는 길거리에서 마시는 그런 음료수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는 작은 행복을 찾아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오늘은 주말이다. 가족들을 위하여 이제 찾을 수 있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하고 도 생각해 보아야겠다.(2004년 4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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