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나의이야기

끝나지 않은 연가

청오 2008. 6. 23. 14:41
 

유천근 교장선생님 정년를 기리며


끝나지 않은 戀歌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수 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뒤돌아보아, 가슴 벅차고 두고두고 안절부절못하는 만남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석가와 아난다의 만남,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과 같은 聖人들의 만남을 기대하지 않더라도, 만남에 흥분을 누르지 못하고 헤어짐에 孤寂한 마음을 쓸어내리던 일조차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동안의 만남이 陳腐하여 헤어짐에 더 신선함을 느끼고 사는 법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역사의 심판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가능하고, 사람의 만남도 헤어진 먼 훗날에야 비로소 그 情理의 의미를 올바로 吟味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곁을 훌쩍 떠나고 만 바로 그 다음 순간부터 빈자리를 體感케 하며 공허한 心鬱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유천근 교장선생님과의 만남을 그런 소중한 만남으로 기억하고 싶다. 인생에 있어서 각자 걸어온 삶의 길이란 모두가 소중하다. 큰길이든 오솔길이든, 올곧은 길이든 우회하는 길이든 각자에게는 소중한 삶의 길이겠지만, 다른 이에게 소중한 한 줌의 밀알을 남기는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始終一貫 지조 높은 길을 걸어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유천근 교장선생님은 진정한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참 교육자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나의 인생에 많은 감동을 주셨다.

  나와 교장선생님의 첫 만남은 2년 6개월 전 어느 봄날이었다. 어리석고 中庸과 解脫을 알지 못하는 俗人인 나는, 나에게 마주친 거대한 艦船 같은 존재에 숨이 막혔다. 천길 물 속보다 깊은 눈과 웃음 없는 얼굴. 阿修羅를 지키는 羅漢같이 준엄하게 다가온 그분은 우리 학교를 지키러 온 교장선생님이셨다. 강렬한 눈빛, 큰 키와 빛나는 이마, 威風이 嚴正한 교장선생님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정말이지 숨이 막혔다.

  그때부터 나와 동료교사들은 교장선생님의 빈틈없고 엄격한 학교경영에 따르면서 구일고 교육 발전의 行軍을 시작하였다. 원칙과 교육적 신념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은 교장선생님의 학교 경영 방침은 우리들을 緊張시켰고,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나온 불만의 목소리도 교무실 주변을 떠돌았다. 교장선생님의 관심과 열정이 담긴 편지가 계속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선생님들도 학급 경영, 교실 관리 등에 관한 쪽지 편지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별로 없을 만큼 교장선생님의 교육적 신념을 따르기에는 좀 힘이 들었다.  

  나는 그 해 교장실을 쉼 없이 드나들었다. 연구기획, 진로지도 선도학교 雜務들이 몰아치는 날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 교장실 방문을 노크하였다. 결재 서류를 들고 웃음을 잃어버린 채로 심리적 위축을 느끼면서 교장실을 드나들던 두어 달 지난 어느 날, 나는 교장선생님의 준엄한 눈빛 사이로 흐르는 따뜻한 사랑과 布施를 발견하였고,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선도학교 자문위원회를 마친 날 믿을 수 없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의심했다. “정말 수고했어”라는 교장선생님의 천금같은 下言에 종일토록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교장 선생님의 보일 듯 말 듯한 웃음과 위안의 담긴 작은 격려의 눈빛을 통해 지난 날 동안 잃어버리고 지냈던 편안함과 진실함을 느끼면서 긴장을 풀었다. 利己的이고 자신의 安逸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도덕적․정신적 마비를 미리 예언이라도 하듯 깨우쳐 준 공자의 ‘一日三省’을 나는 새삼 음미하게 되었다. 진정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는 진정한 선비의 도로써 師道를 실천해 오신 교장선생님이셨다.

  더러는 일부의 선생님들과의 의견의 불일치로 대립되는 일이 있었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결백한 생활과 교육적 열정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였다. 나는  교장 선생님과 맺은 2년 반의 緣起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 편함을 추구하여 正道에 벗어난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나의 이익과 편안함을 먼저 보고, 나의 게으름과 안일을 파묻혀 본연의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에, 선생님은 오직 제자들의 참교육, 올바른 인간교육 하나 외에는 생각이 없는 분이셨다. 적당히 대강,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식에 더 큰 기대와 환호를 지르는 사람들을 일깨워주시기라도 하듯 교장선생님께서는 늘 곧은길만 지향하셨다.

  이제 선생님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학교를 깔끔하게 단장하고, 학생들의 인간다운 민주적 가치관에 뿌리를 내리고, 학교의 기풍을 振作하시고 학교를 떠나가신다. 돌아보아 교장선생님은 지난 세월 동안 너무 많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하면서도 마지막 떠나시는 날까지 조금의 미혹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떳떳하게 당신의 사명을 굳게 지키신 보기 드문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刮目相對 할만한 발전을 구일고에 남겨두고 떠나시게 되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조그마한 자신의 공적을 針小棒大하기에 바쁘나 교장선생님은 조용히, 소문 없이 학교 경영에 최선을 다하셨다.

  교장선생님의 수 없는 구일고 사랑을 짧은 文力으로 몇 가지로 열거한다는 것은 오히려 累를 끼치는 일인 줄 알지만,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은 것만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의 기본 생활 습관 형성에 최선을 다하셨다. 그 결과 지각이 줄고 학생 폭력이나 비행이 줄고 학교는 항상 깨끗하였다. 학교 붕괴의 우려 속에서도 구일고는 착하고 질서 있고 인간다운 학생들이 많이 남아 있는 학교라는 사실은 교장선생님의 교육적 신념에 기인한 바가 크다.

  또한 공단지역 구로동이 주는 선입감에 젖어 구일고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의 첫 번째 놀라움은 학교가 이렇게 깨끗한 학교인줄 몰랐다는 것이다. 나도 그동안 연구부장으로 다른 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학교보다 더 깨끗한 학교를 본 적이 없다. 청결한 환경이 청결한 마음을 간직하게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정말이지 너무 단정하고 정결한 학교를 만드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功은 강당 신축이라 할 것이다. 우리 학교는 88올림픽을 치르고 남은 자재로 임시로 지은 체육관이 있었는데, 체육활동이나 체육행사를 하기에도 별로 소용에 닿지도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東奔西走하여 관계 要路를 방문하고 협조를 구하여 드디어 陋屋같은 체육관을 헐어내고 새로운 다목적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고, 지금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 건물은 체육관, 전자도서실, 시청각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지역자치단체 지원 부족으로 수영장을 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기는 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지 않은 이 지역에 들어설 다목적 건물은 이 지역의 교육의 수준을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학교가 푸른 숲으로 덮여 가는 것도 교장선생님의 땀이 흠씬 배인 일이다. 교문을 들어설 때의 삭막한 느낌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교문 입구에서부터 반기는 키 큰 나무들의 환호와 푸르름의 교향곡은 우리들의 산뜻한 하루를 예약한다. 학교 푸른 숲 가꾸기에 들인 깊은 관심과 열정은 학교의 역사를 보증하는 산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꽉 막힌 교문 앞 진입로 확장을 위해 거의 2년여의 세월 동안 四方으로 뛰신 노력이, 결국 지역주민들의 작은 이해와 욕심에 부딪쳐 成事되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헤어짐 없이는 만남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이 사람일까. 비로소 교장선생님께서 떠나시고 난 다음의 빈자리를 상상하니 追懷의 아쉬움에 가슴이 저며온다. 겉으로는 차가우신 것 같았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작은 웃음으로 남겨 주신 가슴 뿌듯한 사랑을 나와 동료교사들은 잊지 못한다.

  가끔씩 교장선생님을 괴롭혀 온 胃痛은, 36개 星霜의 교육적 열정과 동료 직원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제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진실의 흔적일 것이며, 잠시도 멈추지 못하는 깊디깊은 참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신 履歷書일 것이다. 이제 헌신과 희생으로 꿈이 여물어 가는 교실을 조용히 후배 교사들에게 물려주시고, 새로운 세상과 인생의 문을 열고 열려진 공간에서 가슴 편히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시고 성취하시길 빌고 싶다.

  胃痛도 가라앉아 이제는 지리보다 매운탕을 드시고, 칠성소주보다 두꺼비 쐬주 한 잔 더 깊이 깊이 목을 축일 수 있는 綱寧함이 언제나 교장선생님과 같이 하고, 가정의 따사로운 행복과 우주만물의 福樂이 永存하게 되시길 第三 第四 빌면서 교장선생님에 대한 끝남 아닌 시작의 戀歌를 마친다.(2001년 8월 27일. 구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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