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레드우드의 교훈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참 열심히 한다. 학교 정규수업 시간도 부족하여 방과후 수업에 매달리고 이어 자율학습에 온 힘을 쏟다가 고적한 하루를 마감하는 시계소리가 들려올 자정 무렵에야 집에 도착한다. 그 정도뿐이라면 보통의 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학생들이 수업 마치지 마자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집에서 과외로 밤을 잊는다. 언제 특기를 살릴 여유도 개성과 끼를 휘날릴 틈도 없다. 그렇게 하고도 서울대학교 입학은 꿈이다. 이 서울대학은 관악산 옆구리에 있는 서울대가 아니고 서울에 있는 대학 말이다. 소위 In Seoul이라 불리는 이 대학들은 수험생들에게는 꿈에서나 만나 볼 듯한 이상향이다.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리지 영~ 감이 없는 어른들도 많겠다. 자기들이 대학에 다닐 때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꿈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닌 없는 현실 앞에 그래도 자식이 전라도 경상도에 있는 대학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달래보면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고3 자녀를 겪어보지 않은 부모들은 이러한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혼해 첫 아이를 가져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느낌에 참 가슴 뿌듯하였을 것이고 유치원에 다니는 놈에게는 대통령의 꿈을 심어 주면서 못돼도 판검사는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는데, In Seoul이 목표라니 속된 말로 환장할 심정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서울 시내 일반 고등학교 졸업생의 평균 20%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가 어렵다.
요즘 학생들은 밤낮을 잊고 공부 하는데, 결과는 왜 그렇게 초라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한두 가지로는 설명이 안 된다. 원인도 수십 가지고, 양상도 수십 가지다. 여기서 그런 수십 가지를 다 논할 수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수십 가지로 쪼개서 살펴보는 일도 어렵다. 그러나 한두 가지 꼽는다면 응집력의 부족과 유대감의 부족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요즘 학생들은 한 시간도 집중하지 못한다. 공부 시작한 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휴대폰 문자메시지 만지고, 인터넷 보고, 오락하고, 그러다 옆 아이들과 떠들고, 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하는 학생들의 정말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다. 응집력, 다른 표현으로 보면 집중력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지만 응집력이든 집중력이든 자기 자신의 마음 하나하나를 모아서 면학의 경지로 들어서지 못하고, 각자 다른 세포가 되어 스스로 자기 주변에 흩어져 맴돌고 있다. 몸뚱아리만 하나로 정형화되어 책상에 박제되어 있지 정신은 조각조각 난 채 창밖에 버려져 있다는 말이다.
유명하다는 이천쌀밥을 먹어 봐도 그 맛이 옛날의 이밥 맛이 아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찬이 없어도 쌀밥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비우기는 게 눈 감추듯 했다. 그리도 그때의 쌀은 근기(根氣)도 있어서 밥 한 그릇 먹으면 쓸 힘 다 쓰고도 하루를 무사히 버텼다. 그런데 요즘 쌀은 근기도 없고 입맛도 맞추어 주지 못한다. 그나마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의 쌀밥의 근기라도 있었으면 싶다. 베트남의 '안남(安南)'지방에서 생산한 쌀인 알랑미, 즉, ‘안남미(安南米)’는 근기가 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의 우리 아이들도 내적 응집력에 있어서는 흩어지는 것이 이와 다름 아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전속탐험가이자, 야생동물보존협회의 생태학자인 마이크 페이는 독특한 미국의 레드우드 숲이 15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번성하는 듯하다고 전했다.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국립공원에는 세콰이어의 일종으로서 높이가 무려 110m가 넘는 자이언트 레드우드라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우리 건물로 치면 35층 정도에 해당된다. 만일 우리가 이 높이에 물을 끌어올린다고 생각하면, 100㎠ 구경의 파이프를 사용하는 경우 1,100Kg 이상의 힘을 가진 펌프를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나무 꼭대기에도 잎이 달려 있고 꽃이 무성하게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펌프도 없는 나무가 어떻게 높은 데까지 물을 끌어올려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나무의 응집력이다. 뿌리에서 흡수한 물이 나무 구석구석까지 도달하는 것은 미세한 세포 속에 있는 물이 장력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의 응집력과 물과 세포벽 사이의 점착력에 의해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끊이지 않고 연결되는 것이다. 응집력이 참으로 부족한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레드우드의 응집력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응집력의 부족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공동체의식이나 유대감 또한 없다는 점에서 걱정이 많다. 우리 세대들이 한두 명에 불과한 자녀를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증에 가까운 투자 집념과 빗나간 애정이 키워놓은 결과이기에 우선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한다. 즉 어느 누구를 비난하기에는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개인주의, 남의 일에는 관심도 애정도 없고 생존을 위한 유대 관계까지도 무시해 버리고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젊은이들은 뿌리 없는 나무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작은 시련에도 참고 견지 못하고 방황하고 좌절하기 일쑤다. 지난 강한 바람에 무참하게 넘어진 아카시아나무나 잣나무들과 다름 아니다. 그러나 레드우드라는 이 거목은 체구에 비해 뿌리가 연약하지만 태풍에 쓰러지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뿌리가 땅 밑으로 깊게 뻗지는 못하지만 옆으로 25미터 이상 뻗어 한 뿌리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 나무이지만 땅 속에서는 한 뿌리에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은 레드우드의 이러한 공생을 위한 유대가 정말 필요한 사회가 아닌가 싶다. 정서적 유대감이 전혀 없는 사람들 틈에서 버티고 서 있는 고독한 현대인으로 우리는 생존하기 위하여 애쓴다. 가족끼리의 유대감도 사라졌다. 한 이불 밑에 누나, 오빠, 동생 할 것 여러 명이 다리를 척척 얹어놓고 잠자고 밥 먹고 공부했던 그 시절은 경제적으로는 빈곤의 극치였지만 가슴은 늘 따뜻했고 걱정도 없었다. 같이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고 믿음직스러웠고 든든했다.
어머니는 춘궁기만 되면 쌀을 꾸러 다니기가 일수였고, 분기마다 학비를 빌리기 위해 이집 저집을 기웃거려야 했다. 그런 모습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는 참 부자다. 지구촌에는 아직도 기아에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입맛 없어 못 먹지 없어서 못 먹는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한다. 그런데도 가슴 뿌듯한 행복감에 겨워하는 사람은 드라마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실로 변해버렸다. 부부간, 부모와 자식 간에 아름답고 행복하고 대화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변했다. 그러니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에 대하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에 대한 깊은 의식 속에 빠져 있는 진실함을, 미래지향적인 실천 정신을 레드우드 같은 응집력으로 빨아올리고, 힘들고 복잡한 사회를 함께 행복한 지구촌으로 키워하는 유대감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대다. 이웃집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른다는 이 무관심한 사회에, 땅 밑에서 서로의 뿌리를 감고 강풍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은 레드우드의 유대감으로 이 사회의 행복을 열어 보자. (20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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