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이 바로 서려면 학생 인권이 살아야 한다.
학교가 바로 서고 공교육이 정상화 되려면 교권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원의 권리를 무시하고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공부는커녕 생활교육이나 상담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요즘 교권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면서 교원들은 스승으로서의 존경을 이제는 바라지도 않는 분위기다. 말 좀 잘 듣고 믿고 따르기만 해도 교원들은 자아 존중감에 행복해 할 것이고, 공교육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며, 교육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교사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단언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상관관계는 매우 높을 것이다.
사교육은 상업적 전략을 우선시 하는 서비스 업종으로 교권의 개념이 불필요하지만 공교육에서는 교권이 무척 중요하다. 사교육은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높은 점수를 얻는 기계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일이 목표지만, 학교는 창의적 능력을 지닌 참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일을 본래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교권이 왜 학교에서 추락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교권 회복의 방안들이 실효성이 없는가? 아마 그것은 학교가 교육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거나 목표와는 다른 교육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의 학교는 참다운, 개성있고 창의적인, 베품과 나뭄의 인간성을 가진 인간 육성의 교육 목표들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학교나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다 해 주고 따라만 오면 된다는 식의 과잉 교육이 이런 현상을 초래한 것이라 생각된다. 옛날 교육이 몰개성적이고 단순해 보였지만 지금의 교육에 비하여 훨씬 더 창조적인 교육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아이들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경험하고 실천에 옮겼다. 대학도 학과도 직장을 선택하는 일도 학교나 부모가 아닌 스스로의 몫이였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낭만도 있었고 서로의 아픔을 감쌀 수 있는 뛰는 심장도 가지고 있었다. 선의의 경쟁으로 열심히 노력도 하고 배고프고 가진 것 없어도 좌절하지도 극단적인 선택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학교는 많은 교원들의 주장대로 왜 이렇게 참혹하게 바뀐 것인가? 사회적으로 억압된 제도, 변화의 시대적 분위기, 남을 돌아보지 않은 이기적 인간관, 소유만이 법이고 진실이라는 왜곡된 가치관, 이것들을 부추기는 상업적 유혹과 부모들의 미혹함. 참으로 다 셀 수도 없는 원인들이 혼재하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학교는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았어야 했다. 목숨을 건 영업 전략을 가진 사교육에 따라 가지도 못하면서 참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일을 버리고 경쟁과 줄 세우기에 급급하였다. 문제 푸는 능력, 입학 성적 올리는 일로 신명을 바쳤다고 주장하지만, 학원보다 더 잘 가르치고 학원보다 더 좋은 성적을 학교가 낼 수 있었더라면 교권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교육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학교와 교원들은 아이들에게 맞는 미래의 비전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적 신념과 역할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다. 교과부와 교육청에서 무책임한 폭탄들이 날아왔어도 학교 문을 굳건하게 지켰어야 했다. 깜깜한 밤거리를 헤매는 이방인처럼 교육 관료들과 교원들이 교육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동안 교권은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도 외부적인 요인에서 교권 추락의 원인을 찾고 있으니 교권의 회복을 위해서 어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요원한 메아리일 뿐이다.
최근 많은 교원들은 교권 추락, 교실 붕괴의 원인을 가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학부모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부모들의 가정교육 부재를 탓하고, 자녀들의 인성교육에는 소홀하면서도 교과 성적 중심, 입시 중심으로만 관심을 가지도록 강요하는 탓에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현상은 결국 수업시간에 잠자기와 떠들기,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등으로 수업을 망치게 하였고, 결국 교사와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나쁜 것도 좋게 보고 부족한 사람도 칭찬하는 미덕을 소유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몽둥이로 기존의 권위를 지키고 점수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들도 관용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존중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녀교육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시간적인 여유를 가진 부모도 많지 않다. 교원은 학부모이면서도 교육 전문가다. 그래서 아이들을 하루 종일 맡기도 월급을 준다. 학부모들이 가정교육 잘 해 주는 것은 금상첨화이겠으나 궁극적으로 바랄 일은 아니다. 교육전문가인 교원들이 정확한 교육 신념으로 제 목표를 견지해야 할 일이다.
다음으로 교원평가 제도를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특히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만족도 등의 평가권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감히 제자들이 스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목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서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 정치인도 선거를 통하여 평가받고, 공무원뿐만 아니라 모든 사기업에 이르기까지 조직의 한 구성으로서 평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홀로 심산유곡에서 나물 채취로 연명하고 세상을 잊고 사는 사람도 평가규정은 없지만 자연의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면 과언일지는 모르지만 어떤 모로는 억지 주장이 아니다. 선생님에 대하여 가장 알 아는 부류는 교장도 동료교사도 학부모도 아니다. 학생이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평가권을 물건을 고르는 일 정도로 폄하한다면 이는 스승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신감을 잃은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를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또 어떤가? 물론 학생인권조례에 드러난 내용을 하나하나 우려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학교에서 생활지도를 어렵게 하는 분위기를 감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 중심의 생활지도, 모든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기에는 정말 불편한 존재가 학생인권조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괜히 잠자는 사자 같은 놈들의 콧털을 건드려서 학교를 불편하게 한다고 보는 시각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앞으로 이 세상을 책임질 사람은 누구인가? 또 그들이 무슨 능력을 가져야 이 세상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미래의 대한민국과 더 큰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 나갈 소중한 존재는 우리 아이들이다. 소중한 존재이므로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받들어야 할 존재다. 무시당하고 외면당하고 무관심 속에 방치된다면 세계는커녕 자신의 몸뚱이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게 된다. 인격적으로 대접 받아야 남의 인격도 존중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통제적인 권한을 거부하고 교사들의 수업을 방해하며 기존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그들을 정화시킬 것이다. 너무 빨리 완벽한 성과를 기대서도 안 된다. 좀 기다려야 하고 좀 베풀어 주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던 때에도 이미 교권은 무너지고 학교는 황폐화되었다. 언제 그들의 자치 능력을 인정해 주었는가. 처음에는 좀 부족하고 실수도 하고 사고도 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씩 맡겨 주어야 한다. 경험이 스승이다. 수동적인 지식 교육으로는 더 이상 이 세상을 헤치고 나갈 수 없다. 그들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들 먼저 주도권을 조금씩 주면서 적응해 나가도록 교육해야 창조적인 능력, 협업의 능력을 길러 줄 수 있을 것이다.
교권이 무너지게 된 배경을 제도적인 부분, 사회적인 요인에 더 비중을 두고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제도적인 조건, 사회적인 분위기 등의 문제가 큰 장애이기는 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교원 추락의 원인을 교원들 내부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외부의 조건에 집착해서는 교권을 회복하는 방안도 실효성을 거두기 힘들 것이라 본다.
교권 추락의 1차적 원인은 교사의 관심 부족과 사랑의 결핍에 있다. 물론 많은 교사들은 희생을 감내하면서 사명감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고, 아이들을 위하여 눈물 나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인정한다. 그러나 더 많은 교사들은 자신의 이익과 안락이라는 굴레에서 발을 빼려고 하지 않는다. 교육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 각자가 교육과정 범위 내에서 자신의 소명을 불사르는 행위가 교육이다. 아이들도 정말 힘들고 복잡한 사회에서 산다. 불쌍하다. 없이 살았어도 우리 세대가 과거에 살아온 것에 비교조차도 할 수가 없다. 인정과 칭찬에 인색한 우리 사회, 늘 공부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갖은 규칙과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이다.
선생님들이 그들에게 진정성이 담긴 관심과 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선생님들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권위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주는 것이다. 교권을 무너뜨리는 요인은 외부의 힘도 조직도 제도도 아닌, 바로 나 자신 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인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안락에만 방점을 두며, 학생들이 다만 귀찮은 존재로만 여기면서 교권을 운운한다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특목고, 자사고, 특성화고 등 각양각색의 학교 형태가 많아지면서 일반계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정말 아이들을 가르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개별 맞춤식 교육, 아이들 능력껏 스스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 수업으로 혁신하여 보라. 수업 시간에 떠들고 잠자는 원인을 학원에서의 선행학습, 학부모들의 사교육 열풍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알아들을 수도 없도록 그들에게 수업이란 방식으로 획일적으로 밀고 나가면 교실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공부할 수 있는 교실 환경 구성은 교사들의 몫이다. 강압적인 제도나 행·재정적인 지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업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설명한다고 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정말 올바른 교육 방법도 아니다.
교권의 학립은 학생 인권의 존중에서 시작된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주인을 잘 따른다. 미래에 살아갈 사람은 우리 세대가 아니라 아이들이다. 그들에게 자기 주도적 역량을 길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지시와 통제 중심의 수동적인 학교생활에서 미래를 살아나가는 지혜도 능력도 얻을 수 없다.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들의 개성을 허용하면서 스스로 적응기제를 기르게 하고 창의적인 능력을 길러낼 수 있는 허용적인 교육이 이제는 살아나야 한다.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의 머리칼이 좀 길어지고 귀를 뚫는 일이 좀 많아지고 획일적인 통제와 지도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들의 생각과 판단을 존중하는 인내심을 보이면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하여 기성세대의 우려를 걷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을 지켜보려면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고 힘든 길이 앞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가 아니어도 이 시대는 옛날의 권위와 방법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원들도 변해야 한다. 교권의 추락을 걱정하지 말고 교권의 회복을 외치기 전에 모든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존중받고 참다운 교육을 받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학교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먼저 살피자. 미래의 지성을 준비하고 능력을 길러나갈 수 있는 여건을, 교사가 먼저 자율적으로 희생과 감동으로 만들어 간다면 교권은 항상 존경받는 그곳에 머물고, 교권에 억지로 찾으려는 노력은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라 굳게 믿는다. [2012. 10. 22. 가을비 쏟아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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